이탈리아 피렌체 바르디 백작이 이끈 귀족 및 예술가들의 모임 ‘카메라타 Camerata’에서 1597년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Daphne]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1600년의 [에우리디체Euridice]가 되었답니다. [에우리디체]는 프랑스 앙리 4세와 피렌체의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 축하연을 위해 의뢰된 작품으로, 몇 대의 류트와 하프시코드가 무대 뒤에서 반주하는 단조로운 모노디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7년 만에 선을 보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같은 소재를 다뤘는데도 이 [에우리디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발전적 규모의 작품이었지요. 그래서 음악사학자들은 오페라의 본격적인 출발을 바로 이 [오르페오]의 초연으로 보기도 합니다. 몬테베르디는 대체 어떻게 이런 획기적인 오페라를 발표할 수 있었을까요?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는 르네상스 후기에 때어나 바로크 전기에 주로 활동한 작곡가입니다. 응급외과 의사이자 이발사였던(당시에는 의사와 이발사가 하나의 직업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예로 이발사 피가로를 생각해보세요!) 아버지 발다사레 몬테베르디와 어머니 마달레나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불행히도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음악교육에 열성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몬테베르디와 남동생을 크레모나 대성당 합창지휘자에게 보내 체계적 음악교육을 받게 했고, 몬테베르디는 지휘자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 바이올린 연주, 합창의 가창법을 배웠답니다. 그는 15세에 3성부 모테트와 완벽한 미사곡을 작곡했고, 17세에 만토바의 실세 빈첸초 곤차가 집안에 들어가 현악기 주자로 일했으며, 20세에는 이미 5성부 마드리갈 모음집을 출판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습니다.
만토바 궁정 시대
1590년, 스물세 살의 몬테베르디는 곤차가 공작의 가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어 그 뒤 22년간 봉직했지요. 궁정작곡가라고 하면 꽤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보수는 보잘 것 없었고, 2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몬테베르디는 늘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바로 이 만토바에서 초연한 [오르페오]에 몬테베르디는 40대 가량의 다양한 악기를 동원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초창기의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통상 10-20명 정도 인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르페오]는 음악을 단순한 장식 수준에서 작품의 일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최초의 비중 있는 오페라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만토바 궁정에서 일하는 동안 몬테베르디는 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 작품 [성모마리아의 저녁기도Vespero della beata Vergine](원제는 ‘복되신 동정녀 성모마리아를 찬미하는 저녁기도’)를 완성합니다. ‘저녁기도’란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저녁 전례를 뜻합니다. 유럽에서는 수많은 작곡가가 시편, 찬미가, 마니피카트(성모마리아의 노래)를 조합해 이 '저녁기도'를 작곡했는데, 몬테베르디의 작품이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걸작입니다.
오페라 [오르페오]에서 몬테베르디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성공적으로 음악에 도입했습니다. 이 점은 그의 교회음악에서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 [성모마리아의 저녁기도] 첫 소절에서 이미 드러나듯, 그는 단순하고 차분하던 당시의 교회음악에 빛나는 색채감과 생동감을 불어넣었답니다. 그러나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의 물결에 맞서던 반(反)종교개혁의 시대였고, 그 때문에 교회음악에 각별히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던 시기였습니다. 교회음악 작곡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명료한 선율을 써서 가사를 알아듣기 쉽게 작곡하는 것이었지요.
오페라 [오르페오]의 비극적 여인 에우리디체
르네상스 후기인 16세기 내내 유럽 음악을 지배했던 이 규칙은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고, 몬테베르디 역시 한편으로는 이 ‘구식’ 음악형식을 죽을 때까지 고수한 작곡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확고하고 생산적인 형식의 기반 위에서 몬테베르디는 인간 내면의 열정을 표현하는 찬란하고 극적인 음악을 창조했습니다. 이 [성모마리아의 저녁기도]는 엄격한 전통과 새 시대의 표현법을 가장 절묘하게 혼합한 몬테베르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몬테베르디가 그처럼 이 작품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동기였죠. 20년을 만토바 궁정에서 일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던 몬테베르디는 1610년 교황 바오로 5세가 있던 로마에 갑니다. 스스로를 바티칸 교회에 악장으로 추천하고 싶어서였고, 아들 프란치스코를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시키고 싶었가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몬테베르디는 자신이 지닌 음악적 역량을 충분히 보여 줄 '지원서'로 교황에게 이 [저녁기도]를 헌정했지요.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 시대
하지만 이 소망은 둘 다 좌절로 끝났고, 만토바 공작이 세상을 떠난 1612년, 몬테베르디는 그 후계자에게 해고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마침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 악장이었던 가브리엘리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듬해 그 자리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30년 간 몬테베르디는 산마르코 성당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서양음악사에 길이 남을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오페라 탄생 초창기에 [오르페오](1607)와 [아리아나](1608) 같은 작품으로 장르의 수준을 높인 당사자였지만 그 뒤로 몬테베르디는 긴 세월 오페라를 거의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1600년대 초기에는 누구나 오페라를 일종의 ‘실험예술’로 간주했고, 오페라라는 예술이 오늘날처럼 긴 역사를 쌓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그런 몬테베르디가 다시 오페라를 작곡하게 된 계기는 1637년 베네치아에 최초의 상업 오페라극장 ‘산 카시아노’가 세워진 사건이었습니다. 귀족들의 궁정에서 공연되던 오페라가 누구나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면서 작품 수요가 급격히 늘었고, 그래서 이때 몬테베르디는 [율리우스의 귀향](1640), [포페아의 대관](1642) 같은 성숙한 걸작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포페아의 대관]에 등장하는 화려한 카니발 장면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와 그의 두 번째 황후 포페아의 결혼 과정을 다룬 [포페아의 대관]은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한 최초의 사극오페라이자 등장인물의 개성을 살린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남의 남편을 빼앗아 결혼한 포페아, 친구의 아내를 빼앗은 네로 등 주인공들은 도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 극은 인물들의 말과 행위를 보여줄 뿐, 전혀 도덕적 평가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몬테베르디는 이 작품에서 실제 역사의 주인공들 외에 군인, 유모, 시동, 시녀 등의 평민계급을 오페라에 등장시켜, 당시 상업 오페라 극장을 찾는 평민 관객을 배려했습니다. 또 크리스마스와 수난시기 사이인 카니발 때 공연된 작품인 만큼, 베네치아 카니발의 화려하고 관능적인 분위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상업극장이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는 망각 속에 묻혔을지도 모르지만, 오페라하우스의 개관과 더불어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졌던 것이죠.
대개 이탈리아어로 쓰인 세속가곡 ‘마드리갈’의 작곡가로도 유명한 몬테베르디는 이 장르가 음악적으로 최고의 표현력을 획득하게 된 1580년경부터 1620경까지 마렌치오, 제수알도와 함께 마드리갈의 제 1인자로 군림했습니다. 1580년대에 이미 마드리갈 곡집을 두 권 발표한 그는 만토바에 자리를 잡은 뒤 궁정음악가로서 엄청나게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1590년부터 1605년까지 네 권의 마드리갈 작품집을 더 발표했지요. 반음계와 음화기법을 이용한 가사 내용의 표현은 상당히 세련된 형태로 발전해 극한의 기교에 도달했고, 류트, 테오르보 등의 악기를 반주에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1600년경부터는 극적 효과를 더 강화하려는 의도로 한 사람의 가수가 노래하는 단성 마드리갈이 출현했지요. 1620년 이후로는 다성음악 마드리갈이 거의 사라지고, 바로크 칸타타 혹은 아리아가 마드리갈의 자리를 채웠습니다. 몬테베르디에게는 이 마드리갈 작곡이 바로 오페라 작곡을 위한 준비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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